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가의 난 (문단 편집) == 전개 == 팔왕의 난이 수습되었을 때 서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사마월은 예장왕 [[사마치]]를 황제(진회제)로 세우고,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307년 회제의 조서를 빙자해 스스로 [[승상]]이 되었으며, 308년 유폐된 청하왕 [[사마담(서진)|사마담]]을 죽이고 회제의 친족과 측근들을 숙청하면서 인망을 잃었다. 유연의 아들인 [[유총(전조)|유총]]이 침공해오자 동해왕 사마월은 [[허창]]에 주둔하여 군대를 불러모았는데 회제는 이를 기회라고 판단[* [[역사는 반복된다|지방의 군대를 중앙에 불러들였을 때 이를 정변에 동원하는 것은 예로부터 자주 있었다.]] 10년 전 [[팔왕의 난]] 때도 그랬고 100년 전 [[십상시]]를 [[십상시의 난|제거하려 할 때도 그랬다.]]], 대장군 [[구희(서진)|구희]]에게 밀서를 보내 동해왕 사마월을 주살하려고 했다. 정작 밀서를 전달하는 자가 사마월에게 체포되어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사마월은 '''온 힘을 다해 국가의 혼란을 수습한 자신을 살해하려 든 회제의 처사'''에 격노하다가 분사(憤死)해버렸고[* 그러나 사마월이야말로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 등 주요 팔왕 당사자들 사이에 권력을 잡으려던 기회주의자로 팔왕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라 당시 서진의 혼란 상당수는 그가 만든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는 사마월의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구심점을 잃은 서진 왕조의 중앙 정부는 빠르게 붕괴되었다. 결국 사마월 사망 직후인 311년 4월,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 [[왕연]](王衍)이 동해왕의 영구를 장지로 운반한다는 것을 구실로 황족, 귀족, 정예병사를 포함해 무려 약 10만 명을 이끌고 사실상 '''[[낙양]]에서 도망쳐버렸다.''' 이 도망 행렬은 고현 영평성에서 경무장 기병을 이끌고 온 [[석륵]]에게 추격당해 '''모조리 격파되었고''' 왕연과 서진 왕조의 친왕을 포함한 48명의 고위직들이 모조리 포로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모두 살해당했다. 문제는 석륵에게 격파당한 부대는 '''낙양과 주변 지역을 방위할 주력군'''이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낙양이 포위당하고 사태가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제 사마치는 각 지방의 지원군으로 낙양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전국으로 파견된 사신 상당수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붙잡히거나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어도 각지를 장악한 황족이나 호족들은 팔왕의 난과 동해왕 사마월의 분사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사라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지원군을 보낼 처지가 못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결국 단 1명의 지원군도 낙양으로 보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